2007년 02월 27일
그놈 목소리: 목소리의 역습, 이미지의 반격
이 글은 이글루스 블로거이신 lyh1999 님의 블로그에서 강탈(-.-)해온 글입니다.
제가 바로 전 포스트에 쓴 글과 반대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보여주신 것 같아서, 이렇게 올립니다.
(* 흑흑 lyh1999님 허락없이 요로코롬 떠와서 넘후 죄송합니다.. 문제되면 자삭 하겠습니다.)
그놈 목소리: 목소리의 역습, 이미지의 반격
- 그닥 좋아하지 않는 영화의 단점에 대해 쓰는 건 정말 어렵네요

제 글을 꾸준히 읽으신 분들이라면 제가 영화를 보기 전에 <씨네21>과 <필름2.0> 기사를 꽤 열심히 훑어본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겁니다. <그놈 목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잡지 기사를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공통적으로 이 영화의 감독인 박진표와 박찬욱 감독 사이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알다시피 두 감독의 영화는 그 성향이 매우 다릅니다. 전자는 실화를 소재로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직설으로 풀어놓는 경우이고, 후자는 보다 환타지적이고 동화적인 분위기로 자신을 적절히 감싸는데 열중하는 타입입니다. 그러다보니 두 감독이 서로 친한 사이라는 이야기는 좀 낯설게 들립니다.
그러고 나서 <그놈 목소리>를 봤는데... 이 지점에서 저는 그 이질적인 느낌을 과감히 뒤집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영화의 외관은 <죽어도 좋아>, <너는 내 운명>에 이어 다분히 센세이셔널한 요소들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실화를 소재로 했다는 것, 그 소재도 유괴와 아동살해라는 자극적인 소재라는 점, 거기에다 어느 정도 불편하기까지한 선동적인 기조까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외관들 속에서 박진표가 부지불식간에 다루고 있는 주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건 바로 "목소리"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는 매체간의 인정사정없는 전쟁입니다. <올드보이>를 말과 폭력의 맥락에서 다뤘던 이전 글을 상기해 보시길. <그놈 목소리>는 어떤 면에서 박진표의 <올드보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그놈 목소리>의 범인은 유독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피해자들을 지독하게 괴롭힌다는 점에서 특이점을 갖습니다. 이건 물론 전화로만 피해자와 접선하는 유괴범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 특징이 주목받지 못한다는 결함이 생기기도 하는데, 유괴를 소재로 다룬 다른 영화들에 비해 <그놈 목소리>는 강동원의 목소리로 재현되는 범인의 비열한 어조가 한경배와 그의 부인 오지선(김남주)을 쥐락펴락하는 광경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편 한경배를 실화와 달리 뉴스 앵커로 설정한 것은 애초에 범인을 공개적으로 수배하는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목소리만으로 존재하는 범인에게 있어 한경배를 일종의 짝패로 기능하게 하는 효과를 냅니다. 범인이 전화에 자신의 목소리를 투사하여 한경배의 집안을 쥐락펴락한다면, 한경배는 자신의 이미지를 카메라 앞에 투사함으로써 세상 전체를 쥐락펴락합니다. 영화가 한경배가 공적인 팩트인 뉴스를 전하는 장면보다는 뉴스에 대한 다소 주관적인 오피니언을 날리는 장면에 불편할 정도로 압도적인 비중을 할애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실제로 범인은 이 점을 아주 의미심장하게 응용하며 그를 비웃기도 합니다. "세상에 한경배 얼굴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결과적으로 <그놈 목소리>에서 범인의 유괴는 단순한 범죄를 넘어 전화나 라디오 같은 청각매체보다 강력한 영향력과 권력을 취한 이미지/시청각적 매체에 대한 역습으로 보입니다. <그놈 목소리>가 유도하는 공분의 정서에도 이 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비겁하게 목소리만 남기고 사라지다니!"
지금까지 언급한 사항들은 모두 <올드보이>와의 공통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특정 매체를 손에 쥐고 타인을 마음대로 조종하며 자신의 욕망을 행사하려는 한경배와 범인은 이우진과 오대수의 다이제스트 버전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다만 <올드보이>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타인에게 자신의 권위, 욕망을 행사하는 메커니즘 속에서 일종의 종교적 색채가 은근하게 묻어난다는 점입니다. 한경배가 뉴스 코멘트를 말하는 장면에서,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지극히 평범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범인이 한경배 부부에게 갖가지 지령을 내리고 서울 시내를 헤매게 하며 괴롭히는 장면에서 우리는 <올드보이> 대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로 넘어가 한 가지 익숙한 문학적 수사를 떠올립니다. "기계장치의 신", 데우스 마키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한경배는 (필름2.0의 표현대로) "설경구가 처음 연기하는 지식인 캐릭터"라고 보기엔 부족해 보입니다. 그보단 가부장적 위치에 근거하여 남성성 짙은 신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데 도취된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집에서는 아버지라는 신이자, 집밖에서는 마이크와 카메라를 대동한 'TV장치의 신'인 것입니다. (전화장치의 신과 TV장치의 신, 이 둘은 오지선에 의해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기독교의 신과 연결됩니다.) 이런 한경배의 모습은 굉장히 보편적인 캐릭터라는 것도 지적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언론인들이 쓰는 칼럼 자주 발견되는 소재가 "나는 사회를 (정의롭게) 바꾸고 싶다/바꿀 수 있다"는 언론인들 특유의 신념(혹은 욕망)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놈 목소리>는 한경배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가진 오만, 혹은 착각을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부숴나가는 영화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전화장치의 신"을 가장하는 범인의 유괴 자체가 그 상징입니다. 한경배의 아들 한상수는 그의 비만을 염려하는 어머니가 계모가 아닐까 의심하며, 그 반사효과로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애정, 그리고 TV장치의 신으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닮으려는 욕망을 드러냅니다. 범인은 그런 "아버지라는 신"에 대한 "열성 신자"인 한상수를 죽여버리고, 한경배의 심리 기저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는 "나는 사회를 (정의롭게)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노골적으로 자극합니다. 예컨대 한경배 부부를 남산 케이블카에 태우고 범인 자신은 그들의 차를 훔쳐 유유히 달아다는 장면은 마치 범인이 한경배에게 "그래 넌 거기 위에서 남신 놀이나 하고 있어라 난 밑에서 널 비웃어 주마"라고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정체도 그 속마음도 알기 어려운 범인에게서 한경배가 읽어낼 수 있는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넌 그 유명한 얼굴로 나라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겠지만, 사실 넌 네 가족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놈이야"라는 지독한 교훈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한경배는 자신의 오류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이를 은연중에 툭툭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가 아들이 유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에 떠는 오지선에게 (근거없이) 자기만 믿으라고 장담하는 순간, 상우가 죽는다는 결말을 미리 알고 있는 관객들은 이 캐릭터가 극중에서 근본적으로 내장하고 있는 비극성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이 이전에 언론 보도로 피해를 입힌 적이 있는 친구가 범인이 아닐까 의심하고 서로 충돌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한경배는 자신의 문제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뉴스 앵커라는 공공성만을 가진 신적 존재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반대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한경배의 이러한 여정은 <그것이 알고싶다> 등을 통해 실제 이형호 유괴사건을 다루는 등 언론계에서 활동했던 감독의 진심이 우러나는 반성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영화 종반부에서 오지선이 "말 그대로" 멍든 가슴을 부여안고 성경을 한장 한장 찢어버리고, 그냥 새 아이를 갖자고 (성관계를) 제의하는 한경배를 거부하는 장면에서 그러한 (자기)비판은 극대화됩니다. 이 영화에서 오지선은 기독교를 중심 모티브 삼아 믿음에 관한 문제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데, 여호와를 비롯해 남편, 경찰 등 유괴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오지선이 일종의 가부장적인 신적 권위를 부여했던 것들에 대한 믿음은 모두 무너져 내립니다. 이들은 모두 확실한 근거 없이 오지선에게 그저 "날 믿으라"고 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상우의 구출이라는 가장 다급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들의 무능한 치부는 더욱 선명하게 부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의 성찰과 실화 속 범인을 잡겠다는 영화의 의지는 서로 잘 연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선 후자가 전자를 해친다고도 볼 수 있을텐데, 이는 곧 픽션과 사실의 충돌이기도 합니다. 한경배의 직업을 비롯해서 이 영화에서 변형된 설정들은 매체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종의 신적 권위에 도취되어 있는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그 결과 한상우 어린이의 죽음은 이 영화에서 그런 무책임한 사람들의 무능함이 불러온 결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실화의 재연, 공소시효 폐지 캠페인이라는 목적이 너무 힘이 센 나머지 곧 감춰져 버립니다. 앞서 언급한 전자의 이야기가 한상우의 죽음을 아버지/언론인/경찰/종교...뿐만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범인을 잡자는 후자의 논리는 (공소시효를 폐지해가면서까지) 그 잘못을 유괴범 한 사람에게 돌림으로써 공범으로서의 책임감/죄의식을 편리하게 증발시켜버립니다. 앵커 한경배가 다시 TV 속으로 돌아와 다소 과잉된 눈물연기로 범인을 공개수배하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로 그런 증발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한편 이 장면은 한 사람을 신적 권위에 도취하게 만드는 언론/경찰/종교 등등에 대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문제해결의 도구로서 그런 사회 구성요소 안에 숨어 있는 공공성에 대한 믿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물론 영화 초반에서 다소 오만한 표정으로 "공인"으로서 코멘트하는 한경배와 막판에 한 아버지로서 범인을 잡아달라고 호소하는 한경배 사이에는 많은 변화가 존재합니다. 허나 신적 권위의 허상을 제거한 매체는 과연 공공의 목적에 충실한 것입니까? 아니 공공성을 띤 매체는 과연 신적 권위의 허상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 질문에 회의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는데, 공소시효를 없애고 다같이 이형호 유괴살인범을 잡자는 이 영화는 결국 전화장치의 신인 범인이 TV 미디어에 가한 역습에 영화라는 이미지로 시도하는 반격의 선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형호군의 아버지/한경배/설경구가 눈물을 흘리는 화면 뒤 조종실에서는 "끝까지 가보자, 내가 책임질게"라고 말하는 감독의 목소리는 여전히 뒤가 켕깁니다. 저는 그 감독의 목소리 속에 관객 대중에게 분노할 것을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영화장치의 신으로서의 권위가 없다고 확언할 수 없습니다. 다소 지루한 상영시간이 지난 후에도 한경배의 반성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공소시효를 없애고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제안의 절실함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그 제안 자체는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한편으로 이런 캠페인성 짙은, 나쁘게 말하면 선동적인 방식을 즐겨 사용하는 박진표 감독의 이후 필모그래피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백보 양보해서 센세이셔널한 선동이 정치 역학적인 시각에서 어떤 발전적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요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동이 감독의 말마따나 "에이즈 환자와 된장찌개 같이 떠먹어도 안 죽는다"(<너는 내 운명>)도 아니고, "이 정신나간 전쟁질을 끝내기 위해 부시의 재선을 막자"(<화씨 9/11>)도 아닌, "우리 모두 그 놈을 응징하자"는 의도적으로 모두의 분노와 폭력을 유발하는 것이라면 이마저도 과연 필요악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부분에서 저는 어떤 "상식의 저항"을 느낍니다. 황우석 스캔들 당시 한학수 <PD수첩> PD도 느꼈다는 바로 그것......
2007/07/27
제가 바로 전 포스트에 쓴 글과 반대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보여주신 것 같아서, 이렇게 올립니다.
(* 흑흑 lyh1999님 허락없이 요로코롬 떠와서 넘후 죄송합니다.. 문제되면 자삭 하겠습니다.)
그놈 목소리: 목소리의 역습, 이미지의 반격
- 그닥 좋아하지 않는 영화의 단점에 대해 쓰는 건 정말 어렵네요

제 글을 꾸준히 읽으신 분들이라면 제가 영화를 보기 전에 <씨네21>과 <필름2.0> 기사를 꽤 열심히 훑어본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겁니다. <그놈 목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잡지 기사를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공통적으로 이 영화의 감독인 박진표와 박찬욱 감독 사이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알다시피 두 감독의 영화는 그 성향이 매우 다릅니다. 전자는 실화를 소재로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직설으로 풀어놓는 경우이고, 후자는 보다 환타지적이고 동화적인 분위기로 자신을 적절히 감싸는데 열중하는 타입입니다. 그러다보니 두 감독이 서로 친한 사이라는 이야기는 좀 낯설게 들립니다.
그러고 나서 <그놈 목소리>를 봤는데... 이 지점에서 저는 그 이질적인 느낌을 과감히 뒤집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영화의 외관은 <죽어도 좋아>, <너는 내 운명>에 이어 다분히 센세이셔널한 요소들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실화를 소재로 했다는 것, 그 소재도 유괴와 아동살해라는 자극적인 소재라는 점, 거기에다 어느 정도 불편하기까지한 선동적인 기조까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외관들 속에서 박진표가 부지불식간에 다루고 있는 주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건 바로 "목소리"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는 매체간의 인정사정없는 전쟁입니다. <올드보이>를 말과 폭력의 맥락에서 다뤘던 이전 글을 상기해 보시길. <그놈 목소리>는 어떤 면에서 박진표의 <올드보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그놈 목소리>의 범인은 유독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피해자들을 지독하게 괴롭힌다는 점에서 특이점을 갖습니다. 이건 물론 전화로만 피해자와 접선하는 유괴범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 특징이 주목받지 못한다는 결함이 생기기도 하는데, 유괴를 소재로 다룬 다른 영화들에 비해 <그놈 목소리>는 강동원의 목소리로 재현되는 범인의 비열한 어조가 한경배와 그의 부인 오지선(김남주)을 쥐락펴락하는 광경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편 한경배를 실화와 달리 뉴스 앵커로 설정한 것은 애초에 범인을 공개적으로 수배하는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목소리만으로 존재하는 범인에게 있어 한경배를 일종의 짝패로 기능하게 하는 효과를 냅니다. 범인이 전화에 자신의 목소리를 투사하여 한경배의 집안을 쥐락펴락한다면, 한경배는 자신의 이미지를 카메라 앞에 투사함으로써 세상 전체를 쥐락펴락합니다. 영화가 한경배가 공적인 팩트인 뉴스를 전하는 장면보다는 뉴스에 대한 다소 주관적인 오피니언을 날리는 장면에 불편할 정도로 압도적인 비중을 할애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실제로 범인은 이 점을 아주 의미심장하게 응용하며 그를 비웃기도 합니다. "세상에 한경배 얼굴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결과적으로 <그놈 목소리>에서 범인의 유괴는 단순한 범죄를 넘어 전화나 라디오 같은 청각매체보다 강력한 영향력과 권력을 취한 이미지/시청각적 매체에 대한 역습으로 보입니다. <그놈 목소리>가 유도하는 공분의 정서에도 이 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비겁하게 목소리만 남기고 사라지다니!"
지금까지 언급한 사항들은 모두 <올드보이>와의 공통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특정 매체를 손에 쥐고 타인을 마음대로 조종하며 자신의 욕망을 행사하려는 한경배와 범인은 이우진과 오대수의 다이제스트 버전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다만 <올드보이>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타인에게 자신의 권위, 욕망을 행사하는 메커니즘 속에서 일종의 종교적 색채가 은근하게 묻어난다는 점입니다. 한경배가 뉴스 코멘트를 말하는 장면에서,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지극히 평범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범인이 한경배 부부에게 갖가지 지령을 내리고 서울 시내를 헤매게 하며 괴롭히는 장면에서 우리는 <올드보이> 대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로 넘어가 한 가지 익숙한 문학적 수사를 떠올립니다. "기계장치의 신", 데우스 마키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한경배는 (필름2.0의 표현대로) "설경구가 처음 연기하는 지식인 캐릭터"라고 보기엔 부족해 보입니다. 그보단 가부장적 위치에 근거하여 남성성 짙은 신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데 도취된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집에서는 아버지라는 신이자, 집밖에서는 마이크와 카메라를 대동한 'TV장치의 신'인 것입니다. (전화장치의 신과 TV장치의 신, 이 둘은 오지선에 의해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기독교의 신과 연결됩니다.) 이런 한경배의 모습은 굉장히 보편적인 캐릭터라는 것도 지적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언론인들이 쓰는 칼럼 자주 발견되는 소재가 "나는 사회를 (정의롭게) 바꾸고 싶다/바꿀 수 있다"는 언론인들 특유의 신념(혹은 욕망)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놈 목소리>는 한경배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가진 오만, 혹은 착각을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부숴나가는 영화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전화장치의 신"을 가장하는 범인의 유괴 자체가 그 상징입니다. 한경배의 아들 한상수는 그의 비만을 염려하는 어머니가 계모가 아닐까 의심하며, 그 반사효과로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애정, 그리고 TV장치의 신으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닮으려는 욕망을 드러냅니다. 범인은 그런 "아버지라는 신"에 대한 "열성 신자"인 한상수를 죽여버리고, 한경배의 심리 기저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는 "나는 사회를 (정의롭게)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노골적으로 자극합니다. 예컨대 한경배 부부를 남산 케이블카에 태우고 범인 자신은 그들의 차를 훔쳐 유유히 달아다는 장면은 마치 범인이 한경배에게 "그래 넌 거기 위에서 남신 놀이나 하고 있어라 난 밑에서 널 비웃어 주마"라고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정체도 그 속마음도 알기 어려운 범인에게서 한경배가 읽어낼 수 있는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넌 그 유명한 얼굴로 나라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겠지만, 사실 넌 네 가족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놈이야"라는 지독한 교훈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한경배는 자신의 오류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이를 은연중에 툭툭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가 아들이 유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에 떠는 오지선에게 (근거없이) 자기만 믿으라고 장담하는 순간, 상우가 죽는다는 결말을 미리 알고 있는 관객들은 이 캐릭터가 극중에서 근본적으로 내장하고 있는 비극성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이 이전에 언론 보도로 피해를 입힌 적이 있는 친구가 범인이 아닐까 의심하고 서로 충돌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한경배는 자신의 문제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뉴스 앵커라는 공공성만을 가진 신적 존재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반대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한경배의 이러한 여정은 <그것이 알고싶다> 등을 통해 실제 이형호 유괴사건을 다루는 등 언론계에서 활동했던 감독의 진심이 우러나는 반성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영화 종반부에서 오지선이 "말 그대로" 멍든 가슴을 부여안고 성경을 한장 한장 찢어버리고, 그냥 새 아이를 갖자고 (성관계를) 제의하는 한경배를 거부하는 장면에서 그러한 (자기)비판은 극대화됩니다. 이 영화에서 오지선은 기독교를 중심 모티브 삼아 믿음에 관한 문제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데, 여호와를 비롯해 남편, 경찰 등 유괴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오지선이 일종의 가부장적인 신적 권위를 부여했던 것들에 대한 믿음은 모두 무너져 내립니다. 이들은 모두 확실한 근거 없이 오지선에게 그저 "날 믿으라"고 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상우의 구출이라는 가장 다급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들의 무능한 치부는 더욱 선명하게 부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의 성찰과 실화 속 범인을 잡겠다는 영화의 의지는 서로 잘 연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선 후자가 전자를 해친다고도 볼 수 있을텐데, 이는 곧 픽션과 사실의 충돌이기도 합니다. 한경배의 직업을 비롯해서 이 영화에서 변형된 설정들은 매체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종의 신적 권위에 도취되어 있는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그 결과 한상우 어린이의 죽음은 이 영화에서 그런 무책임한 사람들의 무능함이 불러온 결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실화의 재연, 공소시효 폐지 캠페인이라는 목적이 너무 힘이 센 나머지 곧 감춰져 버립니다. 앞서 언급한 전자의 이야기가 한상우의 죽음을 아버지/언론인/경찰/종교...뿐만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범인을 잡자는 후자의 논리는 (공소시효를 폐지해가면서까지) 그 잘못을 유괴범 한 사람에게 돌림으로써 공범으로서의 책임감/죄의식을 편리하게 증발시켜버립니다. 앵커 한경배가 다시 TV 속으로 돌아와 다소 과잉된 눈물연기로 범인을 공개수배하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로 그런 증발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한편 이 장면은 한 사람을 신적 권위에 도취하게 만드는 언론/경찰/종교 등등에 대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문제해결의 도구로서 그런 사회 구성요소 안에 숨어 있는 공공성에 대한 믿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물론 영화 초반에서 다소 오만한 표정으로 "공인"으로서 코멘트하는 한경배와 막판에 한 아버지로서 범인을 잡아달라고 호소하는 한경배 사이에는 많은 변화가 존재합니다. 허나 신적 권위의 허상을 제거한 매체는 과연 공공의 목적에 충실한 것입니까? 아니 공공성을 띤 매체는 과연 신적 권위의 허상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 질문에 회의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는데, 공소시효를 없애고 다같이 이형호 유괴살인범을 잡자는 이 영화는 결국 전화장치의 신인 범인이 TV 미디어에 가한 역습에 영화라는 이미지로 시도하는 반격의 선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형호군의 아버지/한경배/설경구가 눈물을 흘리는 화면 뒤 조종실에서는 "끝까지 가보자, 내가 책임질게"라고 말하는 감독의 목소리는 여전히 뒤가 켕깁니다. 저는 그 감독의 목소리 속에 관객 대중에게 분노할 것을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영화장치의 신으로서의 권위가 없다고 확언할 수 없습니다. 다소 지루한 상영시간이 지난 후에도 한경배의 반성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공소시효를 없애고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제안의 절실함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그 제안 자체는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한편으로 이런 캠페인성 짙은, 나쁘게 말하면 선동적인 방식을 즐겨 사용하는 박진표 감독의 이후 필모그래피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백보 양보해서 센세이셔널한 선동이 정치 역학적인 시각에서 어떤 발전적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요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동이 감독의 말마따나 "에이즈 환자와 된장찌개 같이 떠먹어도 안 죽는다"(<너는 내 운명>)도 아니고, "이 정신나간 전쟁질을 끝내기 위해 부시의 재선을 막자"(<화씨 9/11>)도 아닌, "우리 모두 그 놈을 응징하자"는 의도적으로 모두의 분노와 폭력을 유발하는 것이라면 이마저도 과연 필요악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부분에서 저는 어떤 "상식의 저항"을 느낍니다. 황우석 스캔들 당시 한학수 <PD수첩> PD도 느꼈다는 바로 그것......
2007/07/27
by lyh1999
# by | 2007/02/27 08:51 | 트랙백 | 덧글(0)



